지구를 지켜라

영화.. 2007/05/09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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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갈등구조가 별로 없고, 줄거리 보다는 이미지나 상징성이 더 평가받는 영화들이 있죠. 빔 벤더스 영화도 그런 평가를 받는 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비록 그가 내러티브의 치밀함으로 관객들 쓰러트리겠다는 아니라 하더라도 분명한 내러티브 안에서 이야기를 진행시키죠. <베를린 천사의 시>도 상당히 귀여운 줄거리가 있습니다.


천사들은 인간 생각의 소리를 들을 수 있죠. 한 천사는 인간들이 침묵할 때 머리 속에서 내는 생각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살짝 맛이 간 녀석(피터 포크) -녀석은 과거 천사였다가 인간이 된 선험적 인물로 그려지긴 하죠-이 아무 생각없이 허공에서 인간이 되는 것도 괜찮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어? 천사의 말을 알아먹는 인간도 있네 하던 찰라에 서커스단에서 한 아름다운 여성을 만나게 되고, 그녀와 인간으로서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싶어서 인간이 됩니다. (인간이 될 때 선물로 청동갑옷을 받는데, 그것을 팔아서 작업비용으로 쓰죠 --;)


<파리, 텍사스>는 나중에 전화기에 대고 하는 대사로 보건데, 영계를 섭외해서 트레일러에서 대충 살림차린 남자가 주인공입니다. 둘은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잠시라도 떨어져 있길 싫어했죠. 그런데 트레일러 안에서 사랑만 나누다 보면 빵이 떨어지고, 그렇게 빵값이라도 벌러 가 있는 시간만큼 사랑하는 여성과 떨어져 있어야 하니까 그게 너무 힘들었죠. 나중엔 여성이 아이까지 갖고 낳게 되니까 빵값에 기저귀값까지 배로 벌어야 하니 더 많은 시간을 떨어져 있어야 하고, 그 시간만큼 사랑을 하는 시간이 모자라게 된 겁니다. 이런게 너무 안타까웠던 남자는 여자랑 대판 싸우게 되고, 그 길로 맛이 간 상태에서 떠돌아 다니게 되죠.


이후 그 남자는 하나의 문제를 인식하죠. 사랑하는 사람이랑 얼마나 가까워야 하고, 얼마나 떨어져야 하는지의 거리감이 헷갈린 것입니다. 정신을 차린 이후 만난 동생에게 사막이 찍힌 사진 한 장을 보여주죠. 그 곳의 지명은 파리(실제 텍사스에 있는 지명 이름)였습니다. 동생에게 사진 속 장소는 너와 나의 엄마 아버지가 처음으로 사랑을 나눈 장소야. 즉 우리의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지라고 말을 하죠. 남자에게서 사랑이란 모든 관념적 관계의 지향점이고, 목적인 거죠. 그에게선 부모가 사랑을 나눈 바로 그 시점에서 자신이 시작됐다고 믿는 것으로 보아 사랑이란 삶의 영역 그 이상의 가치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빔 벤더스는 이렇게 우화적인 인물과 설정으로 자신의 주장하는 바를 다소 쉽고 명쾌하게 드러내는 감독이죠. 즉, <베를린 천사의 시>는 인간의 영역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게 사랑인데 영원하고 무한한 종교 비스무레한 로고스적인 관념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묻는 것 같구요. <파리 텍사스> 아직 그런 관점까진 갖기 전에 만든 작품이죠. 이 사람의 이전 영화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도시의 알리스>에선 길잃은 꼬맹이한테 엄마를 찾아주는 과정을 다루면서 만약 어린 아이가 인종적으론 이미 뭔가 결정되었다 하더라도 그가 자라난 환경을 통해서 새로운 인종으로 될지도 모른단 문제의식을 갖고 있죠. 그래서 자신은 독일인인지, 아니면 독일인의 종자만 받은 다른 인종인지에 대해서 정초하는 스토리를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스토리를 단순화 해서 주제를 명쾌하게 전달하는 스타일이 빔 벤더스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죠. 하지만 빔 벤더스는 어떤 한 관념의 진위여부 보다는 영유되는 자체, 삶에 천착해 버린 사실을 인정하는 인식을 갖고 있는 감독인 것 같습니다. 이렇다 보니 자신이 보는 세계가 자신이 구축한 세계가 되고, 고로 독자가 보는 세계도 빔 벤더스가 본 세계일 뿐이죠. 이런 등호는 상당히 근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세상 끝까지>를 통해서 말하는 미래세계는 아니메 스타일의 디스토피아의 순화된 버전일 뿐인 이유죠. 상업영화에서 밥벌어 먹는 빔 벤더스가 굳이 큐바 음악에 대한 다큐를 찍을 때도 인종적인 시야을 갖다 대는 것 역시 빔 벤더스의 한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장준환이란 조선팔도에서 나고 자란 녀석의 기발함을 빔 벤더스의 문제점과 교차시킬 필요가 있죠. 장준환은 물론 장편영화는 딸랑 한 편밖에 만들지 않아서 이 사람의 재능과 세계관이 이후 오버액숀 펼칠 내용처럼 훌륭한 것인지는 아직 검증이 덜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래 예술가들은 데뷔작이나 초반기의 작품이 이후 명성으로 팔아먹는 영화들보다 더 뛰어난 점이 많기 때문에 과감하게 오버해도 괜찮다 싶기도 하구요.



일단 영화를 만드는 기술자적 재능 만큼은 장준환이 세계적 수준의 감독들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상당히 중구난방할 수 있는 갈등구조를 갖고 있음에도 유려하고, 또렷하게 표현해 내구요. 그리고 인물에 대한 이해나, 주제를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에서도 상당히 뽀대납니다. 백윤식이 신하균이 어떤 놈인지 기억해 냈을 때, 신하균의 그때까지의 존재감이 한 번 재고되어야 할 시점이 됐죠. 그때 이런 부분을 무리없이 넘기고 꾸준히 자기의 목표한 바를 완성해 내는 것만 봐도 영화를 잘 알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빔 벤더스가 조금 재미없는 영화를 만들어도 세계적 명장이듯이, 장준환이 단지 기술자로서 감독의 재능을 갖고 있다는 것 때문에 이런 썰을 푸는 것은 아니죠. <지구를 지켜라>를 평론가들이 뭐라고 해석했는지 본 적이 없기에 순전히 제가 느끼는 부분에서만 말하는 거라 일반적인 평가랑 다를 지도 모르겠습니다. 먼저 <지구를 지켜라>를 이해하기 위해선 남한의 세대구분을 접하고 갈 필요가 있죠.



젊은 사람들은 그냥 60년대 이전 세대들은 다 구세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해방 전에 초등학교도 다녀보고 그런 세대가 있구요. 해방 되던 해부터 6.25 동란에 태어난 세대도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상당히 분명하죠. 일제 시대에 글자도 배우고 그런 사람들은 무엇보다 사고가 자유롭다는 특징이 있죠. 이 세대는 다양한 사상적 스펙트럼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해방을 원하는 조선인민으로서의 가치관도 있을 것이고,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도 있죠. 사회주의를 진보로 받아들이는데도 별 거부감이 없고, 반대로 미국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이나 환상도 갖고 있지 않던 세대들입니다. 이들은 통일을 지향하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도 명확하게 갖고 있을 수밖에 없던 역사적 배경에서 자라났죠.


하지만 해방둥이라고 흔히들 말하는 세대들은 다릅니다. 이들이 비록 일제시대 끄트머리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식민지민으로 자란 기억은 갖고 있지 못 하고, 전쟁을 겪었음에도 그 참혹한 뒷풀이의 폐단은 겪었지만 전쟁을 직접 겪은 기억은 덜하거나 없죠. 대신 이들에게 주어진 남한의 사상적 스펙트럼은 박정희 개발독재 그대로입니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백윤식이 그 세대죠. 이들은 젊을 땐 산업역군으로 사회에 몸빵했지만, 그렇다고 번영하는 조국을 지향했던 것은 아니죠. 생존의 문제에 집착해서 사상의 문제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던 세대들입니다. 이 세대들과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시절이 겹치면서 이들의 사고패턴은 독재의 편의주의식 그대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개인적으로 이런 이야길 해준 아줌마 한 분이 계시는데 엄청 리버럴 하시더군요. 자기 대학시절인 70년대 초반에는 애들이 대마도 자유롭게 피고 그랬다더군요. 그리고 사회운동도 하긴 했지만, 죽자사자 보다는 살만큼만 참여하는게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박정희와 치열하게 대립하던 시대정신도 있긴 했지만 박정희도 전 세대들과 대립했다기 보다는 계급적/이데올로기적으로 국민들을 통제하는 방식에 능숙했지요. 그리고 이 세대에 속한 사람들이 지금 대통령 하겠다고 나오는 이씨 박씨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세계관을 충실히 대변하는 드라마 작가가 김수현이라고 볼 수 있죠.



암튼 <지구를 지켜라>는 해방둥이 세대와 편의상 386이라 명명된 세대의 대립관계를 납치와 고문이란 스토리를 통해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영화에선 실제로 백윤식(해방둥이)는 외계인이었고, 미치지 않았다는게 밝혀졌음에도 미친 역할에 충실하는 신하균(386)은 자신이 어느 위치에 서 있어야 하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신하균은 못 받은 임금이 있고, 그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야 했죠. 하지만 그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외계인에 대한 투쟁으로 자신의 복수를 설정해 놨습니다. 이런 구조는 일반적인 내러티브는 절대 아니죠. 정체성을 인식하는 과정에 대해서 역이나 이로 (빔 벤더스등이) 이해하는 수준이었다면, 역 이 대우를 자유롭게 넘나드는게 장준환이 구축한 내러티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내러티브를 덮고 있는 영화적 장치들도 빔 벤더스가 그랬던 것처럼 미국 문화의 특성을 빌어오는 것도 유사하죠. 빔 벤더스가 40년대 이후 미국 리얼리즘 영화를 빌어왔다면, 장준환은 8,90년대 매니악 취향의 장르영화의 요소를 갖고 오죠. <양들의 침묵>에서 본 듯한 지하실 구조나, 매니악물에서 자주 등장하는 한가한 시골의 외딴집의 설정들도 그렇고, 외계인을 고문하는 조악한 에피소드들도 마찬가집니다. 빔 벤더스가 로드무비(서부극 따위의)의 장르적 특성을 따라한 것과 비교되는 부분입니다. 이들의 종자는 각 인종적 특성을 갖고 있긴 하지만, 대가리는 미국인이라고 해도 별 상관없는 문화적 배경에서 성장했죠.


이 둘의 이런 특성은 그들이 표현하는 인간의 정체성이란 부분에서도 독일인이 유럽 역사에서 갖는 위치와 그 반성(또는 그냥 단순한 자부심)이 전후세대인 빔 벤더스 자신과 매치되지 않는 점들에 기반하듯이 장준환도 386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한국 사회에서 붕 뜬 두 세대(그 정체성과 문화적 특성을 쉽게 발견하기 힘든)를 통해서 정체성의 문제에 접근하는 유사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빔 벤더스는 비록 독일인의 특성이 명쾌하지 않다 하더라도 독일 사회에서 자라났단 자체에 긍정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분명히 하는 성향이라면, 장준환은 절대 그렇지 않죠. <지구를 지켜라>의 엔딩은 정말 해방둥이는 외계인이 되어야만 하고, 386은 미쳐야만 스토리가 완성됩니다. 물론 현실적으론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말이죠. 이들은 항시 시대와 어울릴 수 없고, 인간 보편의 가치가  추상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장준환이 인식하는 정체성이 빔 벤더스와 반대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영화 안에서 미친 신하균의 눈에만 백윤식은 외계인인 것이고, 그러함에도 신하균은 미치지 않은 단순한 복수만 꿈꾸는 인물이란게 설명되기도 하니까 말이죠. 이렇게 인물에 대한 인식을 중의적이기도 하고, 또 단순하게 설명하기도 하는 방식은 영화 역사에서 아주 특이한 접근임엔 분명합니다. 분명 이런 시도를 한 감독도 있긴 하겠지만, 지금 잘 생각이 안나는 걸 보면 적어도 보통 관객들에겐 특이한 경험을 제공해 주죠.



<지구를 지켜라>의 작품성... 그 작품성의 요소를 인물에 대한 직선적이면서 복합적인 이중의 구조를 놓고 봤을 때 상당히 특이하면서 가치가 있는 작품이죠. 실제로 상도 많이 받고, 또 영화팬들로부터 충성도도 엄청났던 사건이 있었죠. 재상영을 요구한 몇 건의 예(그 중 하나는 채팅을 소재로 한 <후아유>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중에서도 천만다행으로 저주받은 걸작으로 평가유보될 뻔 하다 구제된 사건이 됐죠. 장준환이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어서 빔 벤더스와 유사한 명성을 얻을지, 그를 뛰어 넘는 평가를 받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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